한평생 봉사와 헌신의 삶 살아온 역곡 안동네, 박희자 할머니의 고난

130년 고택 향토문화재 신청하자 ‘일제 잔재’ 낙인 찍고 비난하는 사람들 나타나

차동길기자 | 입력 : 2021/05/09 [18:54]

 

 

 
 
 

 

 

여든 할머니의 60년 봉사활동

무슨 일이든 수십 년 동안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는 자원봉사 활동과 일평생 남을 위해 사는 삶으로 시선을 끄는 기부천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중독은 봉사와 나눔이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부천 벌응절리(역곡 안동네)130년 된 고택에 살고 있는 죽산 박씨 종손 박희자 할머니(1942년생)이다.

봉사와 나눔 활동으로 힘드냐고요? 아니요. 봉사와 나눔 활동으로 오히려 제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박희자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기부를 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장애인, 노숙자, 꽃동네, 천주교, 시민운동단체, 동사무소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했다. 그럼에도 박 할머니의 선행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알려진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박 할머니는 남 몰래 이웃을 돕는 기부천사로 그간의 봉사는 샐 수가 없다. 20대부터 시작된 나눔과 봉사는 40대 초인 1984년 역곡1동 동사무소 신축시 일부 기부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선행으로 이어졌다.

1994년에는 경기도 성환에 있는 육군 제3탄약창의 성요셉 성당을 지어 기부하여 천주교 준종교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2001년에는 역곡성당 신축 헌금 135백만원을 기부했으며 충북 음성 꽃동네에 앰블런스 1대와 아프리카 꽃동네 승합차 1대를 기증했다. 2008년에는 역곡1동 자율방범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봉고차 1대를 기증하는 등 지금도 크고 작은 봉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2012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이태석 신부에게 1천만원을 기부했다.

자신은 옷 한 벌 안 사입어

이런 큰 돈이 드는 봉사 외에도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한 봉사도 엄청나다.

노숙인 영등포 토마스의 집에 직접 찾아가 봉사활동을 한데 이어 지역사회에서 김장김치 나눔과 연탄배달 등에 기부를 했다.

특히 그는 엘리사벳이라는 세례명으로 성당 빈첸시오 회장을 역임하면서 주위 어려운 사람들에게 반찬 봉사를 하고 있다.

봉사를 하면 마음이 즐겁고 보람을 느낍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자라 자연스럽게 몸에 배여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돈을 기부한 박 할머니지만 정작 본인은 남들이 다가는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여행도 한번 가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함께 수영, 헬스클럽, 골프를 배우자고 해도 응하지 않았다.  또 천주교 신도이지만 성지순례를 가지안고  참가 비용을 아껴 이웃을 돕는 등  정작 본인은 변변한 옷 한벌도 안 사 입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목장 운영과 과수원, 야채 농사를 지어 번 돈으로 베품품의 미학을 실천하는 봉사자로 남다른 고향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할머니는 당시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소유인 집과 농토를 모두 매입하여  땀흘려 농사에서 얻어지는 농사수입을 통해 불우이웃 돕기나 종교단체 등에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희자 할머니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봉사활동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나이 많은 독거 어르신들이 2021년 보릿고개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햇반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음성 꽃동네에 장애인 운송 차량구입에 일부 후원할 계획이다.

할머니의 고택은 친일의 잔재?

그런데 이처럼 드러나지 않는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박 할머니가 요즈음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자신이 일평생을 살고 있는 고택이 일제 잔재이며 가족이 친일을 했다는 것이다.

일부 단체의 이러한 주장은 박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보성전문학교를 나와 중앙청(이후조선총독부)에서 일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손녀인 박 할머니 입장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상태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당시 일제 치하에서 조선총독부로 차출되어 근무를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후 할아버지는 성균관 고문으로 활동했고, 그것이 박 할머니가 전해들은 이야기의 전부이다.

박 할머니가 5대째 살고 있는 130년 된 고택은 친일 의혹을 받는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을 서울(사직동)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고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자원으로 활용할 수 없을까?

박 할머니는 최근 고택이 공공택지개발지구에 포함되면서 이 집을 부천시 향토문화제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이를 방해하고 막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 나이 여든입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 나시기만 했지 살지는 않았다. 나의 아버지와 나난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집을 저는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만약 이 집이 부천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면 차후 고택 3채 모두를 부천시로 기부하고 사는 날까지 유지 및 보수에 들어가는 관리비 등 일체를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이 집이 후손들에게 역사 교육의 장소로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을까요?”

부천의 한 향토사학자는이 고택은 단순한 집의 개념을 넘어 조상의 지혜와 기술, 그리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이전 시대의 건축양식과 사상, 그리고 생활방식 및 문화의식을 엿 볼 수 있는 관광 및 교육장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부천시가 원형을 유지 발전 지키는 노력을 통해 관광자원화 할 수 있다. 또한 어린이들이 문화와 실생활을 경험하는 체험관으로 연계하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60년 봉사의 삶을 누가 모욕하나

인터뷰 말미, 박희자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다시 회상한다.

“조상들은 밥 지을 때 마을 주변을 둘러보다가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어머니께서 곡식 몇 되박을 갖다주고 오시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이렇듯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몸소 이웃사랑 실천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박 할머니는 그의 할아버지가 친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평생 나눔과 베품의 삶을 실천해 온 박희자 할머니에게 그 죄목을 뒤집어 씌우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모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고택을 부천시 향토문화재로 신청하자 일각에서의 음해로 밤잠을 설치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그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과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과거와 현재의 간격 앞에서 우리도 갈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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